2015년 1월 17일, 한국을 떠나기 앞서, 디자이너를 비롯한 지인들에게 PBT를 미리 구매하고, 나눠드리는 행사를 했었습니다. PBT 제작 뒷얘기를 비롯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드리는 자리였습니다. 당시 나누었던 이야기를 녹취한 것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PBT가 만들어 지기 전에 어떤 기획회의가 있었는지 재밌게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안녕하세요. 저는 초타원형 출판사 발행인 입니다. 오늘 모여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원래는 가벼운 토크를 나누는 자리로 만들려 했습니다만 막상 행사를 준비하니 발행인으로서 좀 책임감이 느껴졌네요. 그래서 오늘은 단체로 하는 토크가 아니라, 제가 피라미드 영업 방식으로 홍보를 하려구 해요.(웃음)
2) 저희 출판사의 책들은 편집장, 디자이너분들이 모두 함께 만든 제작물이죠. 편집장이신 영민씨, 디자이너 동휘씨, 성구씨, 종민씨가 각각 PBT, 그리고 소책자 Tennis와 Map Model Map 을 맡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건축가 김건호씨, 건축 사진가 김경태씨, 후조시 예술가 진챙총씨와 사찰씨가 객원으로 도와주셨습니다.
3) 저는 단지 발행인이었죠. 사실 디자인에 직접적으로 손을 댄 것은 거의 없구. 대신 기획회의를 자주 했는데 그때부터 계속해서 –
4) 피라미드 얘기만 했어요.
5) 물론 책을 쌓아서 만드는 피라미드 얘기인데요. 포스터를 놓고, 위에 책을, 그 위에 엽서를, 또 소책자를 올리는 방식이죠. 아무튼 디자이너들 한테 “저는 이 피라미드를 만드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계속 강조를 했었어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일단 저는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 건축가입니다. 제가 하는 일은 건물을 아름답고 쓸모있게 만드는 일인데요. 다른 현대 예술이나 디자인 분야랑 조금 틀린 점이 있다면 법규가 까다롭게 연결되있다는 점이에요. 이것이 상당히 작위적이면서도, 또 나름의 맥락이나 사회적인 필요성에 의해서 생긴 규범이에요.
6) 뉴욕의 맨하탄 같은 경우는 두 가지 마찰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예인데, 보통은 그리드로 잘 나눠진 계획 도시라고 알려져 있죠.
7) 휴 훼리스의 조닝 다이어그램이 보여주듯이, 그리드로 나뉜 블락들은 각자 저 마다의 법칙이 있어요. 이를테면 건축면적에 제한이 걸린다던가, 시선을 막기때문에 사선제한이 걸린다던가. 높이 제한이 있다던가… 하는 식으로 해서, 모두 계산하면 디자인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최대한 운신 할 수 밖에 없는 부피가 나오게 되요. 마치 안보이는 벽 처럼 작용하죠. 저 부피 용적을 반드시 채울 필요는 없는데, 인간의 욕망은 늘 이걸 다 채워서 건물 사이즈를 늘리려 하죠. 이런 계산 과정을 조닝(zoning) 프로세스라고 하는데, 부피모델을 시각화하는 것을 바로 매스 스터디라고도 부르는 것이죠. 저 같은 건축가가 건물을 설계하기 한참 전 부터 항상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에요.
8) 건축가 렘 콜하스 같은 경우 저런 상황을 흥미롭게 해석하기도 했어요. 건축물이 기단부에서 그리드를 확고하게 따르고 상층부에서는 얼마든지 미친 조형들이 난무하는 새로운 도시를 그릴 수 있지 않을까- 한 것이죠. 보통 건축가가 드러내는 이런 생각들은 본인이 추구하는 건축물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많죠.
9) 주어진 체계들이 사회적인 합의나 어떤 욕망에 근거한 점, 건축가의 예술적인 미래상에도 영향 받지만 지형과 자연에 의해 형성된,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또 있어요. 맨하탄 아래에는 맨하탄 암반이라 불리우는 암반층이 있는데. 바로 이 특수한 지형 때문에 도시의 아래 쪽과 중심부에 더 고층건물이 들어서기 쉽게 되어있어요. 암반이 단단하니까 건물 세우기 쉽거든요. 가운데는 아니기때문에 결국 옆으로 보면 맨하탄 전체는 이런 식 (손으로 움푹 들어간 형태를 그리며)이 되요. 자연, 혹은 재료에 의해서 법규가 바뀌고 영향받고 재창조 되는 점이 흥미롭죠.
10) 하지만 인간은 인간인지라 언제나 법규나 체계같은 제한을 이용하라고 해도 그저 괴상한 걸 만들어 내기 시작하죠. 이건 지금은 유명한 짤방이 된 국내 있는 어디- 강원도의 도청 건물이라고 하구요. (웃음) 11) 뭐 사실 외국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 분은 디아즈 알론소라는 분인데 이런 분들에 비하면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의 자하 하디드 같은 분은 대단히 엘레강스한 편이죠.
그런데 저는 왜 이런 얘길 꺼낸걸까요. (이 프리젠테이션은 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요.) 책을 제가 아니고 의뢰해서 제작하려고 마음 먹었을 때, 저는 저하고 디자이너 관계가, 마치 제가 건축을 할 때의 관계가 아닌가 생각을 했었어요. 갑이나 을보다는 환경-상황과 저. 즉, 디자이너에게 몇 가지 규칙을 제안하고 그 안에서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는, 보이지 않는 체계를 제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죠.
12) 그 중 하나가 나중에 책들을 높이 쌓을 것이라는 것, 당신이 디자인 하는 책은 전체의 몇 층 즈음에 있을 것이니 특정 면적을 반드시 따르라. 같은.
13) 쌓아서 훗날 무언가를 만들 것이다-라는 얘기는 몇 가지 상황들을 암시하는 데요. 하나는 2차원에서 작업하는 환경에서 항상 3차원으로 변하는 미래를 은연 중 계속 신경쓴단 것이죠. 디자이너들은 나름대로 자기 머릿속에 3차원의 뭔가를 상상하면서 거기에, 자기의 작품 위와 아래에 놓이는 상대방의 책, 엽서, 포스터 규격들이 그려지고있으니까. 연속적인 상황이지만 또 그것이 어떤 디자인으로 올지 모르고.. 시리즈이지만 전혀 다른 내용일 터이고..
14) 이런 것들이 이미 디자인에 어떤 영향을 주는 상태가 되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조닝처럼) 그런데 건축물이랑 책이 다른 점을 떠올린다면, 책이란 그 양식이 (직육면체로서) 정해져 있죠. 그러니까 쌓이더라도 각 객체 형태 변동 폭이 굉장히 미시적이라는 걸 거에요. 책을 쌓아놓고 멀리서 보자면 거의 다 똑같은 사각형의 블락들로 – 마치 저 멀리서 바라본 도시사진 처럼 – 매우 추상적이고 아름답게 보일거란 거죠.
15) 이건 검은 사각형으로 유명한 말레비치의 건축 모형들인데요. (네, 말레비치는 건축 모형도 만들었어요.) 저도 일단 책을 쌓으면 이런 것이 될 거라 예상했었죠.
16) 물론, 오브젝트로서의 책은 그 재료가 다르죠. 종이라는건 가볍고, 휘기도 하니까요. 섬유질 탄성이나, 중철 제본방식에 의해서 저절로 생겨나는 질료의 특성과 하드웨어 접합 양식에 의해 생겨나는 두께들이 있으니까요. 그게 물론 뭐 대단한 하드웨어는 아니고,
17) 고작 스테이플러심이나 실, 접착제.. 같은 것들로 인해서 생기는 가동범위지만. 또 엽서같은 것들은 잘 각이 잡히지 않겠죠. 한마디로 책이라는 물건은 제가 적는 내용과는 또 상관없는 상당히 복잡한 데이타를 가진 실제 물질인 셈인데, 저는 형태나 그래픽적 요소 또 재료와 제본방식들이 모두 합쳐져 버린 일종의 가공된 재료로 본 셈이에요. 과격하게 다루지 않는 상태에서, 이 공산품을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반복해서 쌓아서 무언가가 될 수 밖에 없는 것들을 만들어 보려고 한거죠.
18) 그렇게해서 나온 것이 건축물을 연상하는 무엇이건, 인상적인 오브젝트건, 기념비 같은 무엇인가가건 될 수도 있겟죠.
여기까지가 제가 굳이 여러 디자이너를 불러 책을 만들고 또 출판사를 차린 처음의 동기, 저와 디자이너들 사이의 뒷 얘기였구요.
19) 아주 간단하게 3가지 책에 대한 소개를 더 드리자면, PBT는 방금 제가 이야기한 형태, 재료, 쌓는 방식 같은 것들에 대해
20) 보다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모니터 내부에서 가상 인지되는 상황을 디지털 브러시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맥거핀삼아
21) 구체적 대상을 바라보듯 풀어본 것이에요.
22) 그러니 아무래도 기존 기법서 생각을 하면 분노를 많이 하실것이고.. 그러면 저는 결국 또 사죄를 해야하겠고..(웃음)
23) Tennis 는 성구씨가 디자인 한 책인데. 3가지 책들 중 가장 화려하도록 요구했고, 디자이너에게도 그만큼 부담을 덜 줬어요.
24) 단지 저 미묘한 사이즈만 빼면.
25) PBT는 제가 글씨체나 여백이나 다이어그램 이미지가 놓이는 방식 같은걸 계속 체크하면서 했다면 테니스는 거의 그대로 내버려 둔 것이나 다름이 없죠. 성구씨의 촉만 믿고.
26) 그런데 정작 제작 시 가장 애를 먹었던 게 성구씨 책이었죠.
27) 종민씨가 담당한 M.M.M. 도 마찬가진데, 5.5센티미터로 가장 작았죠. 테니스도 그랬었지만 이 크기 때문에 ISBN도 못 받을 뻔 하고…
28) 아무튼 종민씨랑 성구씨 소책자는 그냥 하루에 모든 걸 끝내버리자고, 이건 과제같은 거라고 우스갯 소릴했어요.
29) 이미 콘텐츠를 예전에 거의 정리해 놓아서 거의 하루 이틀, 뭐 제작 때문에 변경하느라 시간이 걸렸던 정도였구요.
30) 결국 소책자들은 PBT를 보좌하는 3차원 형태에 담긴 전체적인 도판이라고 보시면 될 거에요. 예컨데 PBT에서 하는 이야기들, 가상의 재현, 그것을 가능케 하는 시점들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바로 그 시점들의 세계-모형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이죠. 테니스가 저 둘 사이에서 바라보는 시점의 변화를 (그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고 있다면요.. (후략)
20150117-Presentation at The Book Socie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