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전 스마트폰을 본다. 켜는 앱들은 사람들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스마트폰이 출시된 이후 언제나 자기 직전에 유튜브를 틀어 보는 습관이 있었다. 2010년부터 유튜브는 나에게 케이팝 걸그룹 뮤직비디오들을 추천했다. 당시 내 유튜브 계정의 국가 코드는 미국으로 설정되어 있었고 평소 케이팝 음악을 유튜브로 듣거나 하진 않았으므로 그런 추천은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팬들이 아이돌 그룹 컴백 무대에 맞춰 조회수 100만을 채우려 클릭한 것 등이 영향을 주는지 아니면 나의 이름이나 그외 다른 정보를 통해 내가 한국인임을 알아낸 구글의 소행 때문인지 의문했지만 곧 별생각 없이 링크를 누르게 되었다.
시스템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보기 시작한 21세기 케이팝 영상들은 다른 국가 업로더들의 해상도 낮은 희뿌연 영상들과는 달랐다. 디테일이 살아 있는 고화질 영상은 케이팝 뮤직비디오 뒷배경의 어설픔을 확인시켜 주고, 특수 소재 의상의 조악함을 그대로 드러낼 정도였다. 그러나 음악적 완성도와 무대미술의 어색함과 별개로, 영상은 그 자체로 새롭게 다가왔다. 먼지가 가득한 하늘만 바라보다 맑은 날을 맞이한 듯, 고해상도 영상은 그 당시 나에게 속이 시원해지는 경험을 선사하였다. 동시에 조금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이런 경험은 나 개인을 넘어 국가와 인종을 초월한 모든 이들이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케이팝의 원형이라 할 90년대 아이돌 음악이 끊임없이 일본이나 미국 팝 음악 표절 시비에 휘말렸던 것을 본다면 이런 상황은 퍽 고무적이다. 적어도 현 시점에서 케이팝은 전 세계 사람들을 레트로-신세계로 인도하는 “다시 만난 세계”로서, 리뷰 영상의/리뷰 영상 붐의 시발점으로 인식되니 말이다. 2009년부터 유튜브 케이팝 리뷰어가 증가한 이유가 정말로 나의 추측대로 타국 업로더들의 영상과는 눈에 띄게 다른 화질 및 음질 상태 때문이라 한다면, 합성된 리뷰 영상과 뮤직비디오 해상도의 낙차가 만들어 내는 풍경이란 괴이함과 생경함이란 단어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화면의 좌우 하단에 작게 위치한 고화질 케이팝 원본 영상은 웹캠으로 찍은 저화질의 리뷰 영상과 비교했을 때 공간적으로 훨씬 앞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음에도 시간적으로 과거에 만든 것이다. 케이팝 리액션 및 리뷰는 둘의 생성 시간 차를 압축시키는 의미로서의 현재이다.
결과적으로 리뷰 영상이란 시간과 공간의 앞뒤 관계가 바뀔 수도 있는 상태이다. 예의 원본과 리뷰 영상의 시간 차이뿐만 아니다. 원본에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군무를 펼치는 다수의 멤버들은 리뷰 영상 속에서는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축소되었고, 그 배경의 리뷰어들 본인 얼굴 근육은 실시간 반응에 맞춰 크게 포착된다. 콩알만 한 프레임 안 장면이 바뀔 때마다 분간이 쉽지 않을 한국인의 얼굴들을 구분하며 소리 친다. 아이돌 그룹 멤버의 성(姓) 없는 예명은 리뷰어들이 쉽게 외치도록 배려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자기 취향의 멤버 이름을 끊임없이 외쳐 대는 영상에서 팬은 합성 영상의 주인공인 동시에 배경이 된다.
시공의 뒤틀림은 역설적으로 엄밀히 설정된 리뷰 형식, 작게 들어간 원본과 초라한 배경이라는 위계 구조를 유지하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리뷰 영상의 양식은 바로 이 단단한 위계질서 안에서 조금씩 진화해 왔다. 자신의 뒤에 TV 모니터를 세워 두거나 그린 스크린을 활용한 고급 편집으로 이제 리뷰어는 원본 영상 앞으로 튀어나오기도 하며, 4K 고화질로 원본의 고화질을 넘어서는 초고화질 배경이 되기도 한다. 가수의 영상 속 아이돌 그룹 멤버보다 더 많은 이들이 리뷰 영상에 등장하기도 한다. 자신은 숨고 주변 가족이나 친구들을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취재하며 무엇이 진짜 원본인지 무의미할 정도로 원본에 들어간 시간과 돈을 월등히 넘어서는 영상을 만들어 낸다.
이 짧은 진화와 역사는 다시 케이팝에 대한 해외 반응이 너무 궁금한 사람들에 의해 선택 취합되어 재구성된 하나의 영상으로 뒤섞인다. 네 개, 아홉 개 그리드에 놓여 있을 뿐인 리뷰 영상은 리뷰라는 형식성에 의해 각기 다른 시간과 개인의 방 사이의 간극이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자그마한 케이팝 원본들은 화면의 상하좌우 랜덤으로 쪼개져서 뿌려지고, 각각의 리액션은 음악의 흐름에 맞춰 일순간 하나의 반응으로 조합된다. 그렇게 케이팝 뮤직비디오는 한때 리뷰 영상의 현재라는 시간에 휩쓸렸었지만, 통합된 영상 속에서 시간만큼은 재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고전 건축 도면 평면 위의 기둥처럼 움직이지 않을 원본들 사이에서, 조금씩 다르게 진화한 모든 양식들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시간에 맞춰 흐르는 음악과 그에 따른 반응들뿐이다.
재조합된 평면을 통해, 나는 감정과 느낌조차 정교하게 담을 수 있는 공간을 상상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벽들은 모두에게 동일한 크기를 방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는데, 이 방은 모서리의 이질적인 접합으로만 인식될 보이지 않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내부에는 모든 것을 지탱할 단 하나의 기둥만이 놓이게 된다. 각 방마다 놓인 기둥은 모두 같은 형태이지만 매번 미묘하게 다른 크기로 확대되거나 축소되어 있다. 이 무질서하게 배열된 기둥이 사실 보이지 않는 벽의 질서를 따라 형성되었다는 것을 눈치채기란 약간의 관찰력만 지니고 있다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다수의 리뷰 영상과 다수의 아이돌 인원의 집합이 보여 준 그리드 합체 영상은 다시 뮤직비디오의 변형된 판형과 추상 표현이 강조된 최신 R&B 아티스트의 리뷰 영상에서 절대적인 이미지로 진화한다. 이형의 검은색 상자는 정교한 규칙과 시스템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추상 공간의 움직임을 극대화한다. 잠에 들기 전에 본 가수 딘(Dean)의 리액션 합성 영상은 그렇게 무한 반복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에디슨이 만든 원뿔과 사각형의 박스, 그리고 두 개의 원반 축을 가진 테이프, CD케이스에서 원과 사각형을 발견한다. 바둑판 위에 얹혀진 하늘이라는 고대인들의 세계모델처럼, 모서리 없는 것이 모서리에 얹혀진 형태이다. 디지털 시대에 들어선 순간 우리가 기억하던 예의 형태들은 거의 모두 박물관으로 들어갈 운명에 처하게 되었고 그 자리를 뮤직비디오들이 대체하게 되었다. 레트로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매체가 다시 유행을 하는 것은 바로 이런 형상에 대한 향수때문인 것일까? 누군가에겐 음악의(시간의) 종말이 다가온다 외칠지도 모른다.
시간 축에 매달린 무엇인가는 늘 프레임을 필요로 한다. 이젠 그것이 하나의 정형화된 형태보다는 계속 합성될 운명을 띄게 되었다는 점이 다른 점이지만. 그럼에도 더 높은 차원으로 넘어갈 수록 정교하고 보이지 않는 규칙을 필요로 한다. 원본 뮤직비디오라는 사각형 프레임은 다소 맥락이 느껴지지 않는 16:9에서 조금 세로가 짭은 영상패널안에 어색하게 끼워진다. 하지만 곧 스마트폰의 전체화면으로 전환될 때 뮤직비디오의 인터페이스 화면이 절묘하게 끼워진 상태로 채워지기 위해서 그랬음을 깨닫게 된다.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기도 전에 우리는 다시 이 영상이 캠이나 스마트폰으로 찍은 리뷰 영상에 의해 조각조각 해체되리란 걸 느끼고 불안해진다. 한편으로는 유튜브의 프레임에 맞춰 모두 합쳐지면 정돈된 그리드 안으로 포섭되어 아카이브 될 운명임도 잘 알고 있다. 해상도가 끝없이 늘어난다면, 이제 그리드 안의 인덱스에서 지금의 원본을 재추출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중력과 물질성이 없는 공간에서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더 높은 차원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 공간이 진짜건 가짜이건 더 높은 차원으로 축조된 가짜의 공간에서 다시 원본을 캐내려는 사람들은 어쩌면 미래의 고고학자들이 꿈꿀 원본(열화본)일지도 모른다. 침대에 누워서 아직도 잠을 못 이룬 나는, 잠이 올 때 까지 계속 뒤틀리며 연속된 벽을 지닌 “사각형”안에 담겨있는, 어쩌면 가짜기둥에 의해 살포시 올려져 있을 뿐인, 시간의 “원형”을 본다.
CC, 보이지 않는 벽, 합성 공간, 가짜기둥 -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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