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 양식
《Nu-Frame》 전시는 여섯 점의 원화 스케치와 여섯 점의 유화, 그리고 열두 점의 아크릴화로 이뤄져 있다. 작품에 사용된 재료와 도상은 다르지만 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여러 형태의 사각형 프레임들이다. 작가가 2014년 《Nu-Type》 전시에서 서구 신화의 이미지를 아시아의 서브컬처 이미지(아니메, 망가, 게임) 양식으로 치환하는 콘텐츠 생산 방법을 탐구했다면, 이번엔 콘텐츠를 담는 프레임 양식을 탐구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전시 작품의 주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나에(Danaë)이다. 하지만 맨 먼저전시장 앞 윈도 갤러리에 놓인 것은 여러 사각형이 합쳐 긴 직사각형을 이룬, 노랑, 파랑, 분홍, 주황, 빨강, 보라의 여섯 가지 단색화들이다. 다음으로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하는 작품은 안쪽 깊숙한 곳에 놓인 22x16cm 크기의, 다나에의 흑백 누드 스케치 여섯 점이다. 양옆으로는 파랑, 노랑, 분홍을 주색으로 한 추상 패턴들이 73x117cm 크기의 캔버스에 그려져 있다. 틈새에 끼인 듯 배치된 작품들을 보고 난 뒤, 관객은 돌아나와 안쪽으로 향하는 텅 빈 복도를 마주하게 된다. 복도 끝 벽을 따라 놓인 다나에의 여섯 표정들이 전시장 전체를 가르는 벽에 절반이 가려진 채 관객을 끌어당긴다. 각기 사각형(tetragon), 사다리꼴(trapezoid), 직사각형(rectangle) 등의 형태에 그려진 표정들은 관객의 동선에 따라 순차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캔버스들이 윈도 갤러리의 단색화들과 동일한 형태와 크기라는 점을 상기해 보면, 다각형의 틀은 고정된 채, 도상, 색, 감정, 효과 들이 바뀌며 얹혀(import)지고, 또 합치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시장의 가장 안쪽은 세 개의 캔버스가 붙어서 완성된 261x194cm 사이즈의 다나에들을 위한 공간이다. 세 다나에를 만드는 총 아홉 개의 캔버스는 결합과 분리가 가능하지만 전체를 연속된 퍼즐 이미지처럼 조합하기 위함도, 또 완결된 이미지를 해체하기 위함도 아니다. 면면이 살펴본 대로 캔버스 프레임은 큰 이미지를 나누거나 연결하지만, 내부의 이미지는 독립적으로 구성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입구 정면에 놓여 있던 스케치 원화, 그 배경은 이 세 다나에에서 분화해 낸 데이터라고 생각되지만, 별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세 다나에의 전신은 각각 사각형(tetragon) 두 개와 사다리꼴(trapezoid), 혹은 사다리꼴 세 개의 형태가 합쳐[1] 만들어졌다. 만화라는 맥락에서, 틀의 형태는 만화 원고지의 칸을 현실에 확대 재현해 놓은 것 같아 보이지만 어딘가 다르다. 캔버스들 사이의 경계는 딱 달라붙어 일말의 여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칸의 바깥쪽과 안쪽은 그 내부에 놓일 프로그램의 구분이 없는 것처럼 도상이 연속되거나 잘라져서 배열되어 있다. 굳이 만화에 비유하자면 흔한 쇼넨망가(少年漫画, 소년만화)―성적 대상화 양식을 소비하는 소년들을 위한―가 아닌, 쇼조망가(少女漫画, 소녀만화)의 컷 구성에 가깝다.
만화의 칸-경계선은 본래 도상과 시공간을 나누는 시각적 기호이다. 벽 안에는 여러 공간(도상과 시점)의 파편이, 그리고 벽과 벽 사이사이의 여백에는 시간이 끼어들 수 있다는 약속인 것이다. 서양의 코믹스를 기반으로 발전한 일본의 망가 형식이 칸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층의 소실점에 잡아 두려 했었다면, 다시 망가에서 분화되어 나온 쇼조망가는 극단적인 평면구성―마치 문학이나 잡지의 텍스트 배열 같다― 그 자체이다. 쇼조망가에서의‘칸의 바깥’이란, 매체의 프레임 안에 둘러싸인 또 다른 칸으로 간주된다. 칸의 바깥은 안쪽에 그려진 도상 주변을 떠다니는 물방울, 빛, 식물과 같은―감정과 운동감을 나타내는 효과―상징물들을 담음으로써, 클로즈업된 얼굴과 대비되는 역할을 한다. 이런 현상은 칸이라는 기호에만 종속되지 않는다. 다나에의 얼굴과 머리카락 등 모든 선은 배경과 효과를 담거나 나누는 경계가 되므로 칸 바깥의 오브젝트들은 결국 모든 선을 칸처럼 넘나들며 안과 밖을 뒤섞기 시작한다.
이러한 연출에서 경계-대각선은 극단적인 평면구성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압축된 3차원 좌표로도 읽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게임 <드래곤 볼 Z 초 무투전>에서의 연출[2]처럼, 대각선은 화면에서 회전하며 캐릭터 사이 공간의 깊이와 거리를 확장, 축소시키고, 축의 방향도 바꾼다. 회전, 확대, 축소되는 대각선은 구(Sphere)의 표면 위 두 점을 내측에서 연결한 선분이 2차원에 투사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연속적인 구의 표면은 선으로 나뉘어 동시에 여러 대의 카메라로 촬영한 듯한, 분절된 이미지를 담는다.
인물의 표정과 신체, 효과들의 배치는 경계를 중심으로 나뉘고, 합치된다. 혼란스럽지만, 이러한 “맥락 없음”은 잴 수 없을 것 같은 감정들을 가시화한다. 표정과 신체는 감정에 맞춰 미묘하게, 혹은 과격하게 왜곡된다. 쇼넨망가의 양식으로 그려진 다나에의 왜곡된 신체는 쇼조망가의 양식으로 둘러싸인 공간 안팎으로 밀려다닌다. 쇼조망가의 공간에서 캐릭터와 배경 사이의 효과-오브젝트들은 도상의 앞과 뒤를 구분 지으며 단 하나의 사건―다나에가 특정한 감정을 분출하며 깡총 뛰어오르는 동작―을 치밀하게 구성하는 것을 돕는다.
이윤성이 지난 전시에서 보여 준 이질적인 두 양식―서구 신화와 서브컬처 만화/아니메/게임의 도안―의 충돌은 매체 형식을 고민하며 또다시 재연되었다. 즉, 소년들의 욕망이 응축된 모에 여성 캐릭터는 다시 소녀들의 욕망에 의해 완성된다. 완성된 평면은 투시도적 환영을 뛰어넘으며 재정의될 것을 요구받는다. 화이트 큐브의 소실점과, 화면 내부의 평면과 입체를 넘나드는 대각선들이 만나 연성된(transmuted) 키메라는, 프레임 양식의 부분과, 합성된 전체로서 유형(Nu-Type)을 나누고 합쳐 담는 ‘Nu-Frame’으로 명명되었다.
뷰, 머티리얼, 텍토닉 시뮬레이션
이윤성의 작업은 서브컬처 제작자들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공간에서 시작하지만 그림은 언제나 모니터를 넘어 실제 크기를 가진 회화로서 화이트 큐브 공간에 놓이게 된다. 작가는 디지털 환경에서도 3차원 좌표의 전시 공간과 구축 방법을 계속해서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이 글은 사실 전시를 시작하기 전에 쓴 것이다. 실측된 실제 전시 공간 도면과 작품의 디지털 데이터를 모아서 모니터의 3차원 좌표에서 전시를 가상으로 재현하는 것은 이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교하게 가시화된 전시 공간은 현실에 한 발짝 앞서, 작가가 던졌을 법한 질문을 추적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a. 캔버스를 개별적으로 제작해 하나하나 그려야 하는 현실과 달리, 디지털 환경에서는 곧바로 최종 직사각형 틀에 맞춰 도상을 그릴 수 있다. 작가는 그림 위에 간단히 레이어를 하나 더 얹어 잘라 내고 싶은 부분을 표시한 가상의 경계선을 그려 놓는다.
b. 이 선은 실제론 깊이도 넓이도 존재하지 않는 개념적인 선이다. 작가는 선의 레이어를 껐다 켜고, 화면을 줌인-아웃 하며 오브젝트들을 배치했을 것이다.
c. 이제 도상과 경계선은 3차원 공간에서의 실체화를 요구한다. 캔버스의 외곽선 x-y에 z 값이 추가될 것이다. 3차원 프로그램에서 검은 선과 캔버스의 관계를 재연하는 것은, 건축 설계 도면과 건물로의 가상-실체화에 비유해 볼 수도 있다.
d. 하지만 경계선은 맨해튼 마천루의 그리드(Grid)나, 도심 외곽의 집합 주택이 일구는 집합주거 단지(suburban housing)의 형상처럼 올라타거나(top down), 상승하지(bottom up) 않는다.
e. 오히려 경계선은, 회화의 표면을 따라 흐르며 경계에서 네거티브(-, negative) 깊이 값을 가지며 침하해 선의 주변을 들어올린다.
f. 완벽한 시뮬레이션을 위해서는 접촉면의 미세한 유격을 만들어야 한다. 캔버스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따내고(Chamfer,) 각각의 캔버스 사이에 임의의 0.x~2mm 간격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현실의 캔버스는 결코 완벽한 결합을 이뤄 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g. 레이트레이싱렌더링[3]은 이제 2차원 이미지에서 가상의 검은 선을 그림자로 드러낸다. 그림자는 초기 스케치에서의 뚜렷하고 명쾌한 검은색 선이 아니다. 픽셀 이미지를 확대해 보면 마치 물감의 산맥을 파헤친 대지미술처럼 보인다.
3D 프로그램에서 재현된 가상 전시회는 도상에 있던 경계선이 회화에서 필수 불가결한 물감과 캔버스로 번역되는 과정을 드러냈다. 많은 경우 번역은 실패를 암시한다. 하지만 도상 자체가 아닌, 매체를 나누는 경계의 번역은 실패에 따른 불안감보다도 무질서한 현실, 부유하는 감각들을 정돈할 수도 있다는 믿음을 준다.
먼저 도상, 이미지를 정리하는 새로운 물질 경계선은 프레임이라는 회화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정의된다. 이것은 단순히 포토샵 상하부에 가지런히 위치한 레이어가 아니다. 질료, 물감 색상, 또 물리적인 깊이 값의 차이를 내며 입체적으로 엮여 있다. 만화적 기호를 넘어 질료와 형태가 이루는 경계면으로 구축 가능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힘으로도 부술 수 없는 네거티브(-)의 벽, 경계는 이제 이미지와 상관없이 분리될 수 있다. 한편 재조합되어도 틀 사이의 간격은 반드시 남아 있게 된다.
렌더링 이미지에서 1픽셀 정도로 얇게 재현되는 경계선은 수 mm 내외로 실측되는 만화 칸 사이 공백을 확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스케일을 자유롭게 상상하게 한다. 이는 세계의 바깥과 세계의 중심에서 내부 표면을 포착하는 두 가지 방향으로 인식된다. 전자는 연속된 물감들의 단층―조경(landscape)―을 가로지르는 기하학 패턴 같은 것이다. 예컨대 일상을 뛰어넘는 위성궤도에서 관측되는 댐이나, 도로, 기찻길 같은 인프라스트럭처, 마이클 하이저(Michael Heizer, 1944~)의 더블네거티브(Double Negative)의 축소모델을 연상케 한다. 후자는 3D 스페이스라는, 가상세계에서의 내밀한 시점을 현실에 옮겨 놓는다. 즉, 디지털 스페이스에서 구면체로 이뤄진 세계의 안쪽에는 2차원 HDR 환경 이미지[4]가 얹혀지는데, 관측자는 구체 중심부터 소실점 공간까지를 평면적으로 바라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요소들의 분리를 바라보는 여러가지 방식은 이제 캔버스를 단순히 도상을 바라보는 창문에 안주하지 않게 한다. 캔버스는 1:1, 1:x 의 비례를 지닌 추상모델로서, 단순하지만 정교한 텍토닉(tectonic)의 흔적을 표면 요철에서 드러낸다. 프레임 내부의 이미지는 완성을 지향하지도 않으며, 회화 기법의 흔적은 물질성의 집착과도 거리를 둔다. 그러므로 전시는 스케치에서 질료와 색이 덧입혀지는, 완성으로의 여정으로만 보기 어렵다. 오히려 관람자는 일찌감치 완성되어 버린 세계의 파편들이 연결되고 부서지는 풍경을 반복해서 보게 된다. 그 풍경은 지탱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새로운 복합구성(Composite Figure)의 기둥-요소들을 꿰어 버리는(penetrate) 뒤틀린 구조-양식의 횡단면(Cross Section)일 것이다.
[1] 사각형 도형의 분류는 사각형>사다리꼴(등변사다리꼴)>평행사변형>직사각형(마름모)>정사각형을 따르게 된다. 작가는 대분류인 사각형과 사다리꼴의 부분들을 합쳐, 유형의 소분류인 직사각형 형태로 크게 만들고 있다.
[2] 만화 『드래곤 볼 Z』를 소재로 만든 게임 중 명작으로 손꼽힌다. 일부는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다. 대전격투게임의 양식을 기반으로 드래곤 볼 세계의 세계관과 물리법칙을 재현하기 위해 시간, 거리를 압축하는 화면 분할 시스템을 도입했다.
[3] 레이트레이싱렌더링은 가상공간에 놓인 오브젝트의 표면에 빛을 쬐고 반사되는 경로를 계산해서 픽셀 이미지를 만드는 기술이다. 현실과 유사한 렌더링 방법으로 재현도도 높지만, 그만큼 컴퓨터의 사양이 요구되며 효과적인 결과를 내기 위한 조건이 까다롭다.
[4] 하이 다이내믹 레인지 이미징(High Dynamic Range Imaging, HDRI)은 일반 사진보다 훨씬 높은 다이내믹 레인지를 처리할 수 있는 디지털 화상 처리 기법이다. 최초에는 컴퓨터 렌더링 이미지의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 개발되었지만, 이후 서로 다른 노출의 여러 사진으로부터 높은 다이내믹 레인지를 갖는 사진을 얻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빛의 변화에 따른 현상(phenomena)의 재현이 가능하다.
Nu Frame, 이윤성, 구조의 단면 – 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