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약 1년 전 저는 디자이너 양지은 님에게『RC』라는 책에 들어갈 텍스트 원고를 요청받았습니다. 『RC』의 기획은 모호했습니다. 보통 책을 디자인할 때는 이미 완성된, 혹은 충분히 기획된 콘텐츠를 바탕으로 사진 등 이미지를 정리한 다음에야 형식을 고려하곤 합니다. 그런데 『RC』는 이와 정반대의 구성을 취했었습니다. 이미지와 글이 어디에 어떻게 들어갈 것이라는 형식이 우선 만들어지고 나서야 제 글이 얹혔습니다. 이것은 디자이너 양지은 님와 저, 그리고 양지은 님 뒤의 인스트럭터 배민기 님 사이에 암묵적으로 정해진 규칙 같은 것이었습니다. 법적 효력도 없는 규칙의 최초 제창자가 누구였는지는 정확지 않습니다. ‘에반게리온 글 같은 아무 글’이나 받아 와서 넣으면 어떨까?’라는 말을 꺼낸 배민기 님이었을 수도 있고, 어지간한 텍스트 양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빈 공간뿐이지만 일단은 시리즈로 만들고 보겠다는 디자이너 양지은 님의 의지가 우선이었을 수도 있고, 느슨한 기획을 듣고서 “우선 본문 디자인부터 끝내 달라”라고 이야기한 저였을 수도 있습니다. 발화 순서는 위부터 차례대로입니다만, 디자인 프로세스에서 합의는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책을 물리적 구조물이라고 보았을 때, 과거에는 구조 디자인 과정에서 그 선택지의 종류가 적었습니다. 현대의 책은 디지털 환경 안에서 자유롭게 책의 양을 늘리고 줄이거나 글씨의 크기나 텍스트 창의 크기, 그리고 문단과 글자 사이의 여백을 필요에 따라 계속해서 바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종이의 재료나, 색상, 제작 방식 등은 절대적이거나 관습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바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난 시기 텍스트는 무자비한 형태의 변형/증식 상태에서 변치 않고 중심을 잡아 주는 것으로 각광받을 때도 있었지만, 책을 특정한 부피와 질료를 지닌 물건으로 중시하는 현대에서 이미지와 텍스트는 이제 이 구조를 지탱하는 중요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주지해야 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것들은 여전히 훌륭하게 형식과 균형을 맞추고 있지만 물질적으로 종이 위에 사뿐 얹히는 잉크 입자들로서, 그 무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존재라는 점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책이라는 통합된 물질을 통해 얻은 경험과 물리적인 스케일, 촉감과 같은 잴 수 없는 감각이야말로, 제작 과정에서 선택해야 하는 무수한 디지털 파라미터의 전제 조건이 되었다는 것은 퍽 재미난 일입니다.
이는 마치 건물의 형태와 기능 관계에 대한 오랜 질문과도 같습니다. 형태가 기능을 따르거나, 다시 형태와 기능이 상관없을 때, 또 형태에서 얻는 효과의 선험을 주시하게 되면 모든 것들을 잡아 주는 것은 또 다시 튼튼하게 고정된 양식들뿐일지도 모릅니다. 이 복고적 (21세기에서부터 20세기를 바라보는 신 고전주의자적인) 태도는 지금의 제작 습관이 그저 유흥이나 순간적인 판단으로 이뤄진 결과가 아님을 증명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RC』의 챕터 -1에서 저는 이상한 형식에 대해 운을 뗐습니다. 이를 통해 제가 말하려 했던 바는 텍스트는 이제 존재 증거의 이미지로 함께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테이블 위에 책을 펼치고 약 50~70센티미터 높이에서 촬영해서 서적 쇼핑몰이나 디자이너의 포트폴리오용 페이지를 채우는 “짤방”이 될 때, 텍스트는 단 몇 장 정도로 압축해서 보여 주는 펼침면 구성의 예시 같은 것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예쁜 도판과 잘 정리되어 가득찬 것처럼 뵈는 이미지 몇 장이, 바로 이 책은 실존하며, 또한 특별한 존재임을 강조할 수 있게 됩니다. 모니터와 스마트폰 스크린 바깥 독자들의 망막에 퍼지는 매혹의 메시지는 21세기 그래픽 디자이너들에게 텍스트, 정확하게 텍스트의 양으로 먼저 다가오며, 아직 만들지 않은 책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요소로서 얹히는 노이즈이자 그 자체로 이미지입니다. 그렇기에 맥락 없이 놓여도 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듯 합니다.
이제 아래부터 『RC』에 실렸던 글의 서문과 마지막 글이 “강의록 1”이라는 이름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순수한 “삽입” 입니다. 『RC』라는 큰 판형(『RC』큰 책의 크기: 26.5×37.0 cm)의 내부에 작은 창(『RC』 텍스트 박스 크기: 7.32×9.8 cm)에서 바라보던 텍스트를 이제 여러분은 작은 판형의 같은 크기 창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점만 조금 다를 것입니다. 이어 짝을 이루는 “강의록 2”가 있습니다. 이는 제가 2016년 11월에 제안받은 디자인 학과 강의를 위한 원고로서, 광학 매체와 전자매체가 기존 매체들과 만나며 일어나는 21세기 초입의 상황을 어느 정도 정리하려는 시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진가 EH의 작업 과정과 대담 등을 병치하여 혼돈으로 지칭되는 상황을 또 다른 질서의 시점에서 재편해 보는 형이상학적 시도의 예시로 들어봅니다.
텍스트는 본래 연속적이지만, 항상 책의 판형과 페이지 내부의 텍스트 창의 제한된 틀을 통해서 바라본다는 점에서, 책이란 저에게 세계를 내려다보는 건물 내부의 창과 다름없습니다. 본 책의 내용, 양식, 그리고 별도 이미지들과 편집 방식은 모두 21세기 이미지에 대한 저의 생각을 통해 협업을 거쳐 제작된 것입니다. 영원한 듯 보이는 노이즈 텍스처 패턴들이 어디에서 만나고 다시 어디에서 끝나는지, 이를 부드럽게 연결해 보려는 디자이너의 태도는 어떠한지 잘 지켜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정현 드림
IMG, -2 노이즈/ 이미지 정보로서의 텍스트 – 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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