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다들 귀여움에 대해서 쓰지 않는 것일까? 나는 언젠가 SNS를 통해 일본과 미국에서 귀여움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하고 있다는 글을 보았다.
굳이 인문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귀여움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당대성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지나친 과장이 아닌가 하겠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먼저 귀여움은 당대성의 특성 중 하나인 무시간성(atemporality)에 들어맞는다. 기원전 22,000년경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Venus von Willendorf), 기원전 10,000년경의 조몬(繩文) 토우 그리고 오늘날의 메타몽(メタモン)은 시간축에 맞추어 배열 가능하지만 귀여움의 측면에서 보자면 순서를 정할 수 없다. 귀여운 것을 만드는 이들이 전통을 거부하거나 역사를 해체하기 위해서 그랬을까? 물론 그랬을 리 없다.
스콧 맥클라우드(Scott McCloud, 1960. 6. 10~)의 만화 어휘 이해를 위한 다이어그램 “큰 삼각형(The Big Triangle)”에 따르면 귀여운 표현은 “언어 경계선(The Language Border)”을 삼각형의 한 변으로 하여 “그림도형(The Picture Plane)”과 “의미(Meaning)”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귀여움의 배열은 역사와는 별개로 양식의 위계 안에서 인식이 가능하다. 그것은 ‘사실’로 겨우 인식될 수 있는 마지노선과 ‘문자’의 시작점 그 사이에 걸쳐 있다.
따라서 귀여움은 언어를 초월한다. 현실을 뒤틀어(deform) 의미를 바꾼다. 일본 대중문화의 유입이 규제되었던 시절 수많은 일본 만화 캐릭터는 한국식으로 현지화되어야 수입이 가능했다. 「란마½ らんま½」에서 창파오(长袍)를 입고 있는 사오토메 란마(早乙女乱馬)도―남궁란마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음에도―가끔은 한복(韓服)을 입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산리오(Sanrio)의 귀여운 팬시 캐릭터는 변형 없이 있는 그대로 수입되기도 했다. 심지어 기모노를 입은 버전조차도!
초등학생 시절 나는 문방구에서 산리오의 케로케로케로피(けろけろけろっぴ) 상품과 바른손 팬시의 금다래 신머루 상품(떠버기 상품과 비교해도 상관없다.)을 번갈아 보며 두 캐릭터 모두 분명 같은 문법인데 왜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일까 생각했다. 구불거리는 외곽선 때문이었을까? 인식하기 어려운 색 때문이었을까?
이것은 귀여운 캐릭터의 황제 격인 미피(Miffy)를 볼 때 느꼈던 것과 궤를 같이하는 물음이다. 딕 부르너(Dick Bruna, 1927. 8. 23~2017. 2. 16)가 1955년에 탄생시킨 이 토끼 캐릭터는 정교한 작도와 셀 채색 기법으로 만들어진 설계의 산물이었다. (산리오 캐릭터의 제작 방식 또한 아마 이와 비슷할 것이다.)
2001년에 코엑스에서 한국 캐릭터 전시를 보았다. 그곳에는 정교한 설계 기반의 캐릭터가 아닌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프로그램을 막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 겨우 그린 듯한 캐릭터가 잔뜩 있었다. 「원피스 One Piece」를 베껴 그린 「와피스 와 Peace」도 그때 보았던 것 같다. 어설픈 캐릭터들은 벡터로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대충 그린 픽셀보다 못했다.
라인프렌즈와 BTS가 만든 BT21 캐릭터가 나오고 카카오프렌즈의 어피치가 일본에서 인기를 끈다는 뉴스가 나오는 것을 보았을 때 시대가 정말 변했음을 체감했다. 이 캐릭터들이 거의 벡터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더더욱. 과거도 현재도 벡터 그림이다. 도구가 바뀐 것은 아닐 텐데 무엇이 변한 것일까?
최신예의 귀여움은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늘 과거와 비슷한 양식을 유지한다. 디지털 도구와 매체를 넘나드는 와중에도 번역의 과정 속에 일치하는 감각이 숨어 있다. 세대가 바뀌고, 그들이 도구나 매체를 보는 방식이 바뀐 지도 20년이 넘어간다.
귀여움은 앞서 이야기한 스콧 맥클라우드의 “큰 삼각형”과 대비되는, 우리가 가진 유형으로 구성해볼 수 있는 ‘삼각형’의 작은 시작점이다. 이제 한국인은 귀여움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귀여움은 영상과 메신저에서 문자 언어를 대신하여 구체적인 감정 표현의 도구로 발전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들이 물컹거리는 슬라임에 눈, 코, 입을 대충 그리는 모습을, 메신저 상대방이 보내 주는 누군가 대충 그린 듯한 카카오톡 이모티콘을 본다.
귀여움이란 만드는 과정에 힘을 많이 들이건 적게 들이건 간에 결과는 대충 그린 것처럼 보여야 한다. 언제 누가 어떻게 그린 것인지를 몰라야 한다. 물론 귀여움의 뒤에는 그렇게 대충 그린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정교한 설계가 숨어 있다. 노력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노력이다. 미피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구조지만 누구도 쉽게 똑같이 그리지 못한다.
미피만큼이나 잘 만들어진 캐릭터 도라에몽(ドラえもん)을 떠올려 보자. 누군가가 도라에몽을 보지 않고 똑같이 그릴 수 있을까? 이를 100명에게 시험한다면 저마다의 도라에몽이 나올 것이다. 솔 르윗(Sol LeWitt, 1928. 9. 9~2007. 4. 8)의 「100개의 큐브 100 Cubes」와 같은 4색 문제의 수학적 개념이 없이도 자연스럽게 100개의 도라에몽을 만들 수 있다.
몇 년 전 라인프렌즈 캐릭터는 이쁜데 카카오프렌즈 캐릭터는 별로라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때 분명히 삼성의 갤럭시가 애플의 아이폰보다 안 예쁘다고도 했던 것 같다. 지금 그들은 카카오프렌즈 캐릭터가 제일 귀엽다고 한다. 그리고 가로로 접히는 삼성의 갤럭시 Z 플립이 애플의 아이폰 11 프로 맥스보다―설계에 더 많은 공을 들인 듯하지만 완성도는 떨어지는 것 같아서―귀엽다고 한다. 우리의 인식은 왜 바뀐 것일까? 귀여운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그린 벡터 도안 속에, 비율이 변하는 보랏빛 사각형을 위한 도면 속에 그 답이 있다.
SEED Vol.2 , 귀여움에 대하여 – 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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