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맥락 / 시작점
한국 예술계에서 팝 아트는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서양 미술사와 한국 미술사의 흐름을 함께 펼쳐 놓은 서울시립미술관 미술사 연표를 살펴보면, 서양 미술사에서 팝 아트는 현대 미술의 수많은 장르를 낳은 시작점인 데 비하여 한국 미술사에서 팝 아트는―다른 미술 사조들을 최대한 빠르게 받아들이려고 했던 것과는 다르게―아예 그 이름을 찾을 수 없고 동시대에 활동했던 최정화, 이불만이 포스트모던, 혼성 문화, 포스트모던 페미니즘 예술가로 기록되어 있다.
이 연표에서 한국 팝 아트 1세대로 불리는 이동기는 찾을 수 없다. 한국의 대중문화조차 아직 역사라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던 시기에 누군가의 작품을 팝 아트로 규정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작품을 팝 아트, 특히 K-팝 아트로 부르는 것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단순한 색면과 인공적 이미지를 차용했다는 점에서 이동기의 화풍은 정통 팝 아트와 공통점이 있지만, 그에게 만화 도안이란 민중 미술과 사회 참여 예술 사이 어딘가에 새 영역을 만들기 위한 선택의 일환이자 한국 대중문화 기반의 일상을 예술화하기 위한 지극히 개인적인 실천이었다.
2000 – 2020 / 변화
이동기가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던 1980년대 후반~1990년대보다 오히려 지금이 한국의 팝 아트를 논하기에 적절한 시점일 수 있다. 지난 20년간 한류라는 이름을 달고 세계로 수출된 한국의 음악, 드라마 등 대중문화가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라이프 스타일로 확장을 도모하며 오늘날 최첨단의 문화 산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대중문화의 약진은 바라보는 시점에 따라 우연의 산물일 수도, 정책과 산업이 맞물린 치밀한 기획의 산물일 수도, 비대칭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불안한 행보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한국 대중문화의 황금기인 1990년대~2000년대를 거치며 활동한 예술가들에게 대중문화는 서구 팝 아트에서 볼 수 있었던 TV, 영화, 잡지 등의 이미지처럼 더이상 학습의 대상이 아니다. 눈을 뜨자마자 보는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속에서 24시간 동안 함께 하는 일상의 일부일 뿐이다. 심지어 이제는 세계인들이 한국의 대중문화를 공부하고 있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점들을 이어가며 나름대로 해석한 뒤틀린 이미지와 음악을 즐기고 있다.
도시 / 문화 / 예술
여기서 2000년대 초 일본의 예술가 무라카미 다카시의 슈퍼플랫 무브먼트를 다시 한번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일본이 지닌 다채로운 시각 문화를 적극 활용하며 지역적인 팝 아트로 등장한 슈퍼플랫 무브먼트는 곧장 서구 미술계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2004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의 일본관 전시는 이례적으로 건축이 아닌 이 새로운 대중문화 예술을 소개하였다. 이는 서구 예술계에서의 팝 아트의 위치와 영향력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그에 대한 일본의 반응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었다. 축소된 도쿄의 아키하바라 위에 반예술적 만화 이미지가 덮여 완성된 피겨-도시는 상위 문화와 하위문화의 분명한 위계 구조를 역전시키는 작은 혁명을 상징하였다.
슈퍼플랫의 등장은 지난 20년간 한국에서 만화를 비롯한 다양한 반예술적 매체 표현을 가능하게 해 주었지만, 한편으로 정체성에 대하여 더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서울의 인구 증가, 정보 통신의 발전, 다양한 시각 문화 예술의 분화 등을 통하여 만개했음에도 한국의 예술이 자국 문화 양식을 비평적으로 분류하고 적극적으로 취합하여 왔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의 대중문화 예술은 슈퍼플랫 무브먼트처럼 뚜렷한 형식과 위계를 드러내기보다는 무차별적 수입으로 야기된 무맥락적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아키하바라와 같은 물리적 거점을 두기보다는 인터넷 커뮤니티 속의 문자와 이미지로서 반복 호출되고 있다.
지도 / 지도 바깥의 모든 지역
일례로 2014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의 한국관에서 펼쳐진 전시는 국가, 이념 등과 같은 형이상학적 개념을 끊임없이 이미지, 모형, 전시 공간의 표피 등 다른 매체로 전환하여 보여 주었고, 최종적으로는 『한반도 오감도』라는 제목의 전시 도록으로 회귀하여 온라인에 홍보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신진 예술가들은 그보다 몇 년 앞서 취향 공동체인 온라인 커뮤니티를 레퍼런스로 삼아 신생 공간을 활용하는 고밀도의 전시 형식을 고안하였다. 이는 서구의 온라인 커뮤니티가 현실의 커뮤니티를 모방한 것과는 반대의 모양새로 전개된 셈이다.
디지털 세계에서 자신의 공간을 인식하게 된 한국인에게 대중 매체와 반예술적 이미지를 화이트 큐브 공간에 불러들이는 행위는 그 의미를 잃었다. 오히려 물리적 인프라인 화이트 큐브 공간의 절대 부족을 극복하기 위한 디지털 공간으로의 출력이 중요해졌다. 온오프라인을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는 환경이야말로 우리의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K- / 끝없는 질주
이번 전시는 위에서 열거한 한국 문화의 다양한 상황을 반영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그들 모두는 서구와 일본, 그리고 막연한 한국적 요소가 빠르게 뒤섞여 잉태된 문화적 정체성을 감추지 않는다. 도무지 논리적으로 연결할 수 없을 것 같은 개별 작품들의 소재와 이를 개의치 않고 엄밀하게 진행된 설계 구성안을 통하여 전시는 무질서와 질서가 교차하게 된다.
작가와 작품은 공평하게 각자의 공간을 가지지만 그 누구도 온전히 만족할 수 없는 구조 위에 놓여있다. 마치 가변형의 웹 페이지처럼 완벽함보다는 확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시는 누가 어느 방향에서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에 공간은 1990년대의 화이트 큐브 갤러리도, 2000년대의 대안 공간도, 2010년대의 신생 공간도 아닌 2015년 이후 만들어진 상업과 비상업의 경계에 있는 신유형의 작은 갤러리로 선택하였다. 그것은 완전한 화이트 큐브의 스케일을 지니지 않은 도시의 오래된 공간이다. 그러나 흰색 마감면은 모든 작품이 그 형태와 질감에 관계없이 흰 공간과 나뉘어 기록될 수 있게 한다. 이로써 빠르게 질주하는 한국의 문화 예술계의 변화무쌍한 양태가 가감 없이 드러난다.
순환 / 기록
본 기획은 한국의 대중문화를 레퍼런스로 삼은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모은 화집을 출판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이 기획에 보다 많은 작가의 참여를 독려할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하여 전시라는 형식을 채택하였다.
따라서 전시 체험의 중요성만큼 그 기록에도 무게를 두고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책은 전통적 도록의 형식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전시 공간의 직접적 번역과 다름없는 형식을 취한다. 또한 텍스트는 비평가 각자의 시점에서 독립적으로 전개되고, 이미지는 작가의 인지도가 아닌 작품 발표 시기에 맞추어 정렬된다.
도록에 실린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통하여 독자는 자신만의 전시를 상상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전시 《네/아니오/좋아요/싫어요/사랑/혐오/댓글/공유: 2000-2020년 한국 대중문화의 초상》은 독자가 전시 도록을 임의로 펼쳤을 때 나오는 조합의 예시 혹은 독자가 전시 도록을 보고 상상한 결과물로서의 과거가 된다.
코로나19 사태 발발 전부터 기획을 진행했음에도 그 과정의 끝을 향할수록 작금의 단절을 예상한 듯 모든 것이 전개되고 있다. “과거는 미래에 대한 최선의 예언자”라는 시인 바이런의 말처럼, 우연히 본 서울시립미술관 미술사 연표 속 단절된 한국 미술사, 그리고 그 어디에도 위치하지 못한 한국의 팝 아트를 떠올리는 순간 본 기획의 형태와 미래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네/아니오/좋아요/싫어요/사랑/혐오/댓글/공유: 2000-2020년 한국 대중문화의 초상》을 기획하며 2020. 4. 11. 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