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M <단층: 기원전 4세기부터 2021년까지 (Fault: From the 4th century B.C. to 2021 A.D.)>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 릴레이 서재#2의 주인인 초타원형 대표 정현이라고 합니다. 먼저 저와 초타원형에 대해서 잘 모르실 분도 계실 테니 제 소개를 간략하게 하겠습니다. 초타원형은 2012년에 설립되었구요. 올해까지 만 9년간 진행 중인 개인적인 독립 출판 프로젝트입니다. 제 작년 2019년부터 초타원형은 출판물 외에도 그와 연계된 가구, 오브젝트, 미술 전시 등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건축 비엔날레, 아트 북 페어 등 여러 이벤트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번 wrm의 레퍼런스 룸 이벤트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WRM으로부터 좋은 제안이 왔고, 이런 기회를 통해서 인사드릴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분들께도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오늘 토크 제목은 <단층: 기원전 4세기부터 2021년까지 (Fault: From the 4th century B.C. to 2021 A.D.)>입니다. 본 제목은 레퍼런스를 보여주기 위한, “책장”을 구성하다 우연히 떠올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소 거창해 보이는 “기원전 4세기부터 2021년까지” 라는 부제는 이번에 전시 중인 151권의 책들의 첫 발행 년도 기준으로 가장 처음과 마지막인 기원전 4세기와 2021년을 나열한 것입니다.
사각형의 비슷한 크기의 책들을 나열하고 쌓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층과 같은 형상을 띠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 방식으로 쌓다 보면 종종 그것들은 뒤섞이곤 합니다. 실제로 영 단어 단층, Fault의 사전적인 의미는 실수, 또는 책임 질 만한 중요한 문제를 뜻 합니다. 잘 쌓여오던 것이 뒤틀리고 섞이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것은 이번에 고른 151권의 책을 나열하면서 여러 번 경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저는 가상의 책장 이미지들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전혀 다른 형태이지만 유사한 3가지 정보를 다른 방식으로 적용한 것인데요. 바로 초판의 발행년도, 물리적인 크기, 그리고 이야기와 그림을 기준으로 한 카테고리를 활용한 것입니다. 현재 발표 중인 이 스크린 뒤에 포스터 형식으로 붙어있는데요, 순서대로 보면 실물 책장의 재현, 건물과도 같은 표면과도 같은 책장, 그리고 층층이 쌓인 타워같이 보이는 책장 들로, 다시 말하자면 가장 이상적인, 흠결 없는 책들과 책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책장은 현실의 책장입니다. 벽에 붙어있던 그림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이것은 개인의 이상과 현실은 언제나 같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고, 창작자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영원한 갈등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색, 형태, 모든 것들이 바뀌죠. 특히, 그림을 그린 뒤 그것을 현실화하는, 또는 현실화를 목적으로 하는 그림을 그리는 건축가들에게, 이런 마찰은 필수불가결한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본 가상과 현실의 책장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발생하는 마찰을 드러내고, 매순간 내린 선택의 결과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wrm에서는 저에게 창작의 기반이 되는 책 리스트를 제안하였습니다. 어려운 질문이지만 창작이란 무엇인가 묻는다고 하면-여러가지 의견이 있겠지만-저는 다양한 레퍼런스를 쌓아보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비단 건축의 아이디어만이 아니라, 건축물의 형태, 질료, 구조 모두에 해당될 것입니다.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역사적인 것들을 익히고 거기에 아주 약간 자신의 의견을 더해보는 것이지요. 거대한 지층 위에 올려볼 개인의 아이디어란 겨우 책 한권 살포시 얹는 정도일 것입니다.
이 개인이 만들어내는 책 자체는 어떨까요? 그 또한 수 많은 것들이 쌓여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정보는 단순히 순차적으로 쌓여지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르거나 얽히는 일이 종종 벌어지곤 할 것입니다. 이를 단절, 혁명, 사건, 위기… 그 어떤 단어로 불러도 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호작용을 통해 일어나는 비예측적인 상태가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거시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작물은 창작자 개인의 손을 떠나면 대중들을 향하게 되면 그들은 창작자가 예상하지 못한 다채로운 의견을 낳기 때문입니다. 저의 책이 누군가에게는 전혀 다른 순서로,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그것은 미미하지만 때로 지층의 결을 바꾸는 중요한 지점일 수도 있습니다.
연극의 개념인 “창발성”은 바로 이러한 상태를 잘 말해주는 단어라고 생각이 듭니다. 창발성, Emergenz란 “어떠한 반복적인 수행의 상태에서, 만드는 이와 보는 이들이 함께 지각하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쌓여온 것들 중 하위의 것을 위로 끌어올리는 상태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하위는 다시 상위로, 그 하위였던 상위는 언젠가 다시 하위로 옮겨가겠지요. 마치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창조를 위한 레퍼런스들은 끊임없이 쌓아 올려지고 단층이 일어나고 다시 순서와 위계가 역전되며 쌓여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순환의 순환’ 과정을 보며 새롭게 지각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핵심 주제로서, 오늘의 발표는 이 리스트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야기하고, 저의 책장과 책에 대해 질의 응답하는 순서로 진행될 거 같습니다.
먼저 목록을 이야기하는데 앞서 미술대학을 다니던 학부 시절 은사께서 주신 ‘디자이너를 위한 책 리스트’ 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당시 선생님의 ‘디자인사’ 수업시간은 유일하게 여러 학과 학생들, 심지어 타 학교나 이미 학생이 아닌 프로 디자이너까지 모두가 청강하던 수업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저희에게 약 100여권에 달하는 책 리스트를 만들어 주시고 그것들을 모두 구매할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배움에는 약간의 리스크가 필요하다는 말씀과 함께 말이지요. 저는 당시 책을 거의 구매한 몇 안 돼는 학생 중 하나였고, 저는 그 점을 퍽 자랑 스러워했습니다. 물론 저 중 과연 몇 권이나 읽었을까 생각해보면 좀 웃음이 나긴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안 읽어도 된다. 책의 실체를 손으로 느끼고 보는게 중요하다고 하셨지요. 이건 제 리스트에 있는 다치바나 타카시의 독서론과 일맥상통합니다. 어찌되었든 시각화된 리스트를 손에 쥐어 본 경험은 저에게 굉장히 강렬하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wrm으로부터 제안을 받아 만들어 보게 된 저의 책 리스트입니다. 여러분이 들고 계신 책 리스트의 원본인데요. 이를 가상의 책장이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옛 은사님께서 주신 것과 달리 엑셀에서 구분하는 여러 개의 셀로 마치 책장 가구 처럼 구분되어져 있고 섞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디지털 문서로서 제가 원하는 정보에 맞춰 재정렬이 가능하지요.
책은 제 집과 사무실, 그리고 창고 세 군데에 흩어져 있던 책들을 모아온 것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제한 아닌 제한이 있었는데, 해외 도서류 보다는 가급적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을 우선으로 할 것, 나의 기준이 아닌 추천 받거나 선물 받았던 책들을 위주로 할 것, 반드시 읽었던 필요는 없고, wrm의 책장안에 들어가는 크기의 책이어야 할 것. 과 같은 기준들이었습니다. 책은 인문학, 철학, 만화, 디자인, 건축, 문학 등 거의 모든 범위에 걸쳐 있습니다.
빨갛게 표기된 정보는 초판의 발행 연도입니다. 이것은 이 책장의 중요한 첫 정보인데요, 바로 책을 놓는 순서를 만들어 줍니다. 단지 순서에 맞춰 놓는 것 만으로도 제가 읽고 접해왔던 책에 대한 기억이 끊어지거나 뒤섞이게 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스캇 맥클라우드의 만화의 이해는 제가 대학원 때야 비로소 읽었고,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는 학부 1학년 시절, 그리고 파이브 스타 스토리 6은 중학교 때 읽었던 책입니다만 나란히 배치되지요.
또 각각의 책 옆에는 높이 값들이 적혀 있습니다. 이것들은 책 장의 실제 크기에 맞춰 정확하게 책을 모으기 위한 방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책장에 완벽하게 맞추기 위해서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후에 기술하겠지만 현실에서 이것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림>그림-이야기>이야기>이야기-그림 으로 끊임없이 순환 할 수 있는 단서도 붙여 놓았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쌓아놓은 순서에 따라 반드시 순환하지는 않게 됩니다.
그런데, 눈치채신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ISBN, 실체적인 수치들로만 이뤄진 정렬 방식이라 하여도 다양한 편집이 가능합니다. 예컨대 초판 발행년이라는 기준은 조금 애매모호합니다. 명심보감 같은 것은 1305년에 지어진 것이 초판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의 내용은 그보다 오래된 고전의 금언과 명구를 엮어서 만들어낸 저작물입니다. 재밌는 점은 우리나라 사람인 추적이 중국의 고전을 망라해 만들어낸 책이 원나라 말기에는 다시 중국으로 수입되었던 역사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넣은 명심보감은 2021년판인데요, 이것은 또한 고전에서 흔히 발견되는 시대착오적인 문구들을 지적하며 만들어진 최신 개정본이기에, 기존과 좀 다르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305년으로 적어둔 것은 저의 선택이지만, 정확한 날짜는 오히려 더 오래되었거나, 여러 년도가 섞여있거나, 심지어는 2021년의 시점으로 재정렬된 것일 지도 모릅니다.
이 리스트 중에는 제가 작업하는 데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책들이 포함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방법 입문>은 여러모로 흥미롭습니다. 폴 발레리라고 하는 시인의 메모장 또는 일기를 그대로 편찬한 책인데, 그 내용과 구성 외에도 한국어 판의 주석을 사용하는 형식 같은 것들이 제가 만들었던 책 CC(copycat, 2016)에 인용되기도 했습니다. 이 경우 제가 주목했던 것은 원본만 아니라 번역된 책의 형식도 중요했습니다.
앞서 외국 서적 보다는 한국 서적을 모은다는 결정을 내리다 보니 이런 차이를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일본의 패션 브랜드 유니클로(Uniqlo)의 총괄 디렉터 가시와 사토가 쓴 <초 정리술>은 한국어 판에서는 완전히 다른 디자인 변화를 갖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그의 내용과 아이디어와 완전히 반대되는 것 같은 표지입니다.
종종 반복되는 서사의 패턴들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설령 긴 시간 떨어진 작품들이라도 말이죠.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과 닐 스티븐슨의 <스노 크래시>는 모두 요즘 관심있는 메타버스나 아바타를 연상케 하는 내용입니다. 그 분위기나 내용은 완전히 다르긴 하지만, 이렇게 하나의 책장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재밌습니다.
또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과, 채만식이 쓴 <인형의 집을 나온 연유>는 나온 시기 상으로 대단히 큰 터울이 있지만, 최신 판을 기준으로 하자면 오히려 헨리크의 책을 모티프로 만든 채만식의 것이 국내에서는 먼저 정리되어 나왔습니다. 실제로도 채만식은 형식적으로는 좌에서 우로 보게 되어 있어 더 옛스럽다는게 특징이네요.
이와 같은 연결은 우연히 발견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은 제가 움베르토 에코의 책 중 가장 좋아하는 책이고 제가 어린 시절 선물 받은 책입니다. 마찬가지로 김경욱의 소설 <황금사과>도 추천받았던 책인데, 이 소설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제목과 여러 설정을 패러디한 중세 수도원 배경의 역사 추리소설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니 제가 원본과 번역, 그리고 패러디된 것들에 관심이 꽤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사실 그동안 제가 만들었던 책들의 기저에도 그런 인식이 있었습니다. 시대는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이야기와 이미지들이죠.
아마도 리스트 신화나 역사, 고전이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그런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비견되는 하위 문화들 역시 많이 다뤄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블레임! 완전판이나 신세기 에반게리온 TV 애니메이션 설정 자료집 2015 에디션 같은 것들은 하위문화로서 새로운 역사와 신화를 쓰고 있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제 리스트의 또 다른 만화들인 파이브 스타 스토리와 밀크 특공대 역시 이러한 하위 문화의 더 심층 있는 하위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책장에는 제가 영향을 받았던 책이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방법 서설외 에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같은 것이죠. 제가 다닌 대학원은 뉴욕 주의 이타카라는 도시에 있었는데, 이것은 그리스의 이타카에서 따온 지명이었죠. 고전과 현대 소설인 율리시스에 모두 나오는 그 지명입니다. 그래서인지 뉴욕의 이타카에는 제임스 조이스에 관한 자료가 많았습니다. 입학하던 해에 저는 우연히 도서관의 희귀서고에 전시된 율리시스를 직접 만지고 읽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앞서말했던 CC의 작업의 내부 구조가 폴 발레리의 방법 서설이라면, 외부의 형식은 전적으로 이것을 따르고 있습니다. 녹색의 페이퍼백이 될 계획이었지만 그와 완전히 대비되는 붉은 색의 양장으로 완전히 바뀌긴 했지만요.
이번의 가상 책장과 책 리스트를 보니 제가 개인적으로 진행했던 또 다른 프로젝트도 떠오릅니다. HTS, Hard Times Selections 라고 명명된 이 책은 실은 찰스 디킨스의 Hard Times 에서 따온 제목이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지닌 모든 건축적 이미지들을 시간과 발표된 책을 중심으로 목록화 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책은 크게 이미지와 캡션 두 권의 책으로 구성이 되어있고, 독자는 나누어진 정보를 조합하며 의미를 만들어 냅니다.
역사적인 이미지들, 이를 검색해서 볼 수 있을 이미지의 이름, 제작자, 그리고 제작 연도 선택 유무 등으로 구분되어있습니다. 목록과 선택이 쌓여 구성된 최초의 3차원 오브젝트인 셈이지요.
당시 저는 이 책을 위한 책장도 별도로 디자인 했었습니다. 강한 대칭성과 그것을 살짝 벗어나는 축을 강조한 이상적인 평면을 강조했었고, 몇 주 지나지 않아 이 도면은 실제로 현실화되었고, 책장은 제가 지금까지 만들어 왔던 여러 책들, 그러니까 알고 있는 것을 묶고 쌓아 만들어냈던 일련의 문서 뭉치들을 재 배열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가급적 손 보다는 컴퓨터 그대로 CNC 기기를 통해 제작되도록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실체화된 책장은 물질적인 세계로 편입되고, 이것은 다시 촬영되어 책이 됩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이후 저의 개인전을 하는 중요한 계기도 되었습니다.
책의 리스트에 책의 가로 세로 높이와 같은 3차원적 정보를 중요시한 것도 결국은 순환과 치환 가능한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 입니다. 151권을 위한 책장을 만드는 것은 막스 빌이 이야기하는 대로, 형식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최초의 가시적인, 물질을 취한 상태이고, 이것은 또 다른 방향의 창작으로 뻗어나가게 될 것이라 예상합니다.
조금 옆길로 샜었습니다. 그럼 다시 제가 만든 3개의 가상의 책장을 살펴 봅시다. 첫번째 것은 아래에서부터 위로, 기원전 4세기부터 2021년 까지라는 지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책장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벽에 맞춰져 세워지도록 되어있는데, 이 경우 일부 책들은 감춰지고 일부는 앞으로 옆으로 도드라 집니다. 만일 지금 우리가 보는 책장이 이러한 상태로 만들어 진다면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리고 어떤 책들을 이어 나갈 수 있을까요.
두 번째 책장은 책을 정면으로 놓고 바닥에 탁본을 뜬 것과 유사합니다. 모든 책은 깊이를 달리하는 책장에 놓이며 바닥면에 맞춰 놓이게 됩니다. 책은 이제 10권 씩 15줄, 그리고 마지막 한 권의 책으로 배열되는데, 이것은 노골적으로 건축물의 외피를 만들기 위한 배열입니다. 여기서 책에 대한 정보는 오직 가로와 세로만이 드러나고 이것은 건물의 개구부를 암시합니다. 안쪽에 파여진 번호는 그것에 대응하는 같은 크기의 책을 넣도록 되어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가상의 책장과 동일한 폭과 높이로 제작한 가상의 책장입니다. 151권은 여기서 10권 이상이 들어가게 되어 결국 6줄 반으로 결정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책은 높이와 두께만으로 완전히 다른 율동을 만들고 있습니다. 책을 쌓는 순서는 아래에서 위로, 그리고 우에서 좌로 진행하였는데, 이것은 지금 우리가 wrm에서 보는 책장과는 완전히 다른 순서입니다.
마지막으로 현실의 책장은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좌에서 우로 진행됩니다. 책장은 저희가 아무리 완벽하게 쟀다고 하더라도, 옆에 어떤 책이 오느냐, 또 종이의 질에 따라 압력이 바뀝니다. 따라서 물질의 세계에서 전체는 압축되어 고작 3줄 절반에 불과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집요하게 책에 대한 물리적 정보를 찾고 그것을 3차원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재현하여 하고 이상적인 치수로 만들어진다해도, 현실의 상황에서 우리는 언제나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맞닥뜨립니다. 위의 가상의 책장을 그대로 옮긴 현실의 책장이라 해도 상황은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 보다도,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며 책장의 순서는 계속 바뀌어 가게 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과거 그가 루브르 박물관의 객원 큐레이로서 기획한 전시, <현기증 나는 목록>과 관련한 인터뷰에서 외딴 섬에 가게 된다면 나는 전화번호부를 가져가겠다. 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전화번호부에 실린 이름들을 가지고 무한한 조합의 무궁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전화번호부에는 인명 외에도 상호 전화 번호 주소 등 갖가지 정보가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단지 항목에 맞춰 정렬된 정보의 목록일 뿐입니다.
이러한 자기조직화, 비순환의 순환을 위한 조건들을 생각해 보자면, 목록은 완전한 것이기 보다는 수행적으로 작성가능한 불완전성을 띄고 있고, 궁극적으로 작성자의 목적, 수용자의 관점과 충돌할 수 밖에 없습니다(창발). 그리고 그 충돌에 의해 생성되는 불연속성, 비예측성의 결과와 맞닥뜨린 관람객은 새로운 지각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보다 적극적인 시선에서 가상과 현실의 책장을 비교하면 여러분들도 여러 이야기를 만들어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현실의 단층에서 가장 좌측 위에 있는 책은 산해경입니다. 여러 시기 동안 전해내려오던 민담과 요괴, 괴상한 동물들을 한데 모아둔 도감집입니다. 그리고 우측 하단의 마지막은 한국 주택의 역사를 목록화한 한국 주택 유전자라는 도감이 있습니다. 이 둘은 제가 책장의 목록을 만들지 않았다면 결코 함께 놓일 수 없던 조합입니다. 어떤 특정한 방식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양 끝 점에 놓일 수 없는 책들이지요. 두 책은 불확실한 정보들의 목록화, 사실의 기록이라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고, 각각 시간의 지층과 단층을 다른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제가 만들어낸 책장의 구조의 반복이 가장 처음과 끝에 미시적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리스트가 대중과 만나기도 전, 어쩌면 최초의 관객이라 할 수 있는 제가 만들어낸 첫 번째 이야기일 수 도 있겠습니다.
발표는 여기까지 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