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BT-TEXT – SUPERELLIP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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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터넷 공간은 거대한 갤러리, 혹은 박물관 창고 같다. 텀블러나 핀터레스트에는 수없이 많은 화가, 사진가, 건축가 들이 만들어 낸 이미지들이 넘실거린다. 과거를 통째로 삼키려는 듯, 모든 것을 스캔해서 디지털 정보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미지 수집광들, 지루한 과제를 수행하는 조형 대학교 학생들, 아름다웠던 과거를 추억하는 사람들이 이를 한몫씩 거들고 있다. 나는 이런 인터넷상의 위험한(저작권법에 저촉될 소지가 있는)이미지들을 몰래 모아 다시 텀블러에 담아 본다. 이미지들은 단 방향 스크롤에 맞춰 기차 칸들처럼 늘어서 있다. 차장인 나는, 연기를 뿜어 대는 맨 첫 칸부터 그다음 몇 번째 칸까지 확인하다 이내 지쳐 버린다. 저만치 뒤에 있는 식당 칸은 둘러보지도 못한 채 말이다. 언제 지워질지 모르는 링크, 스크랩한 본인조차 어디에 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몇 백 페이지 너머에 있는 이미지들이란, 다시 한번 보이지도 못하고 잊히거나 언젠가 사라져 버릴, 불안정한 것들이다. 나는 모아 둔 이미지들이 언제 사라질지 몰라 불안해하느니 차라리 맘 편하게 모두 하드디스크에 저장하고 편집, 출력해서 스테이플러로 중철 제본을 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다운받은 이미지들을 인쇄하는 과정은 흥미를 자아낸다. 모니터 면에 수직으로 평행하게, 전시회장에서 마주하는 화가의 그림같이 서 있던 이미지는 잉크를 흩뿌리는 소리와 함께 프린터에서 수평으로 빠져나온다. 문득 이미지가 프린터의 롤러를 빠져나오는 과정은 압축 사출과도 같아서, 본래 유화의 물감이 눌려 종잇장처럼 평평해져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방금 인쇄된 그림의 원본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화가 이윤성의 그림이었다.

몇 달 전 그의 파주 작업실에 들렀을 때 본 그림들은 벽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거나 바닥에 누워 있었다. 항상 전시장에서 단정하게 걸려 있던 그림만 본 탓에, 그렇게 다른 각도로 놓여 있다는 것이 생경해 보였다. 바닥에 놓인 큰 캔버스는 전시장의 잘 조정된 빛과 달리 형광등과 스탠드 불빛에 의해 물감과 캔버스의 질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트위터에서 본 그의 그림과 달랐다. 마치 제법 그럴듯한 조경-건축 모형처럼, 큰 스케일로 축소된 것 같았다. 내가 개미, 혹은 좁쌀만 한 크기가 되어 그 모형 한가운데 있다고 상상해 보았다. 평평해 보였던 캔버스의 모든 것이 거대해 보인다. 화가가 한 획 한 획 쌓은 물감의 층은 예상 외로 깊은 계곡을 이루고 있었다. 이따금 제대로 메꾸어지지 않은 부분은 마치 끊어진 지층처럼 보인다. 그 단면 층들은 화가가 색을 겹겹이 칠한 의도나 채색 시 그의 무의식적 습관 같은 것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대자연의 협곡과 미국 중부 어딘가에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이 동시에 보이는 장관은 화가의 완전한 세계를 위해 축적된 시간, 그리고 그에 도움을 준 우연한 요소들-우리 모두에게 평등한 물리법칙, 중력 같은 것-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계곡의 층들은 그림을 수직으로, 혹은 수평으로 놓고 그렸는지와 같은, 중력과 획의 방향을 드러내는 표식이나 다름없다. 계곡에 남은 흔적들은 화가가 붓질로 그런 물리법칙을 역행하거나 나름 제어하려 하기도 했음을 짐작하게 했다. 이렇게 아름답고 완전한 모형이 어째서 카메라와 모니터를 지나 프린터로 빠져나오면 이렇게 납작해져버리고야 마는 것일까. 아쉬운 마음에 모니터 속 이미지-작품 사진이 인쇄된 도록을 스캔한 이미지-를 다시 본다. 내가 본 화가의 원본 그림과도, 방금본 도록의 이미지와도 확연히 다르다. 사진의 입자, 그리고 인쇄된 종이의 질감이 더해졌다. 그것은 종이에 인쇄된 이미지를 보았을 때는 인식하지 못했던 질감이다. 아마도 누군가가 구형 스캐너의 렌즈를 거친 천으로 닦아 놓았는지, 미세한 수직선 패턴 노이즈도 이미지 위에 얹혀 있다. 복잡한 지형과 같은 원본의 유화 그림에 전체적으로 균일한 직교 좌표-선들이 그어지려면, 캔버스 위에 수직으로 놓인 빔 프로젝터가 정밀히 쏘기라도 해야만 겨우 흉내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시 개미, 좁쌀만 한 크기가 되어 모니터에 올라선다. 모니터 면에 수직으로 서서, 회화가 수평으로 놓이며 드러냈던 장관, 그 자연의 협곡이 모니터에도 있는지 재차 확인해 보려 한다. 이번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 모니터의 유리면은 주변 사물들을 반사하고 있고, 혹여 반사 각도를 벗어나 유리면 아래쪽 그림이 눈에 보이더라도 너무 균질해서 그곳에선 어떤 높낮이도 찾을 수 없다. 심지어 높낮이를 비교할 만한 어떤 것도 찾을 수 없다. 이번엔 모니터 바깥에 붙은 포스트잇 종이의 말린 귀퉁이에 올라서서, 조금이라도 더 높은 곳에서 경치를 바라보려 한다. 그러나 사각형의 점들이 밀도와 분포를 달리한 채 격렬히 깜빡이고 있을 뿐이다. 이미지의 높고 낮음, 레이어의 깊이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단지 위성이 궤도 위에서 지구를 바라보듯, 평평해진 등고선들을 읽고, 상상하는 방법밖에 없다. 이런 우주공간과도 같은 곳에서, 현대 예술가는, 디자이너는, 건축가는 이미지를 다룬다. 중력도 없고, 질료도 없고, 높이 축 방향성도 전무한 이곳은, 심지어 시간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한번 그었던 획도 다시 없던 것으로 되돌릴 수 있다. 되돌린 획은 그 존재의 흔적조차 확인할 수 없다. 만화가가 펜터치 후 연필 스케치를 지우개로 지워도 그 흔적은 미세하게 남는다. 이미 칠한 유화 물감 위에 꼼꼼히 흰색을 덧입히더라도 그 흔적은 남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처음부터 그것이 없었던 것처럼 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삭제가 가능하다.

물감을 다루는 순서, 붓질의 순서도 상관없다. 만일 잘 분화된 계층에 놓이기만 한다면, 쌓이는 순서와 구조의 안과 밖을 뒤바꿔 버릴 수도 있다. 이제 이미지 생산을 위한 모든 행위를 개별적으로, 세세하게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전자공간에서의 이미지란, 설령 3차원의 좌표상에서 만들어 졌더라도, 결과적으로 도면화된, 모델을 만들기 위한 개념에 더 가까워졌다. 실존하는 물질적 층이나 텍스처는 전혀 없이, 단지 균질한 구조에 얹허진 색을 잡아 둔 이미지는 본래 가지고 있었을 법한 층과 텍스처를 지칭하려 무게도 두께도 없는 레이어는 포토샵 같은 광학편집도구의 돋보기 도구 속에서, 혹은 스마트폰의 핀치줌-확대, 축소, 패닝과 같은 수직 수평을 다루는 손가락 움직임-을 통해서만 일시적으로 시공의 위계를 포착, 인식될 수있다. 즉 디지털 화면 너머 우리 육체의 움직임이 요구된다. 나는 이제 다시 전자공간으로 기어 들어가 더 강력해진 눈으로 포토샵 편집도구를 테스트해 보기로 한다. 개미만 한 나는 컨트롤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반복해서 누르며 수 초만에 1픽셀에서 3200퍼센트까지 줌인, 줌아웃 한다. 평평해만 보이던 공간이 사실을 올림픽 개막식을 위해 펼치는 카드 섹션과도 같다는 것은 확대 축소 명령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관측하는 나의 위치는 물론 처음 위치 그대로다. 화면 속 흐릿해 보였던 입자들은 또렷해지며(혹은 흐릿해지며) 광원 점들의 분포와 크기를 바꾼다. 레이어를 켜고 끄고, 속성을 바꿀 때마다 이미지안에 담긴 것들 사이의 위계를 짐작하고 조절할 수있다. 초 평면 속 감각은 동전이 앞뒤를 보이며 돌듯 반복되는 움직임들, 그리고 반응을 인지하는 시각-뇌에 의존한다. 손가락과 안구의 영민한 운동으로 다각도, 다초점, 초 고해상도와 열화된 웹 이미지를 넘나들며 객체와 질료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모색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시간과 공간도 붙잡지 못하고 말 것이다.

대다수는 광학도구의 정복을 꿈꾸기보다는 종속당해 끌려만 다니는 노예가 된다. 그들은 과거 이탈리아의 건축가가 거금을 주고 장인을 부리는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에 직면하였다. 물론 일인실 넉 달치 월
세에 필적하는 거금을 들여 마련한 이 정밀한 광학편집장치가 딱히 식비나 편안한 잠자리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기계는 역으로 제 주인에게 보이지 않는 갈고리와 낚싯줄을 휘감고서 이래저래 명령할 것이다. 방향 잃은 창조자, 스스로 설정한 규율 하나 없는 가녀린 존재는 확대와 축소, 패닝, 레이어의 눈동자를 켜고 끄는 동작만을 습관처럼 반복하고만 있을 뿐이다. 며칠 밤을 모니터와 씨름하며 밤을 꼴딱 새운 주인은 정크푸드와 부족한 수면으로 피부가 무척 상했다.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푸석한 얼굴을 보자마자 한숨 쉬며 되뇌인다. “아날로그라면, 이렇게 우리를 배신하지는 않았을 텐데.” 과연 그럴까? 프린터에서 마지막 장이 인쇄된다. 나는 프린터와 모니터를 지나며 평평해져 버린 이미지에 어떤 굴곡이라도, 흔적이라도 남겨야 할 듯한 기분이 되어 서둘러 한 장씩 종이를 절반으로 접는다. 기계가 아닌 나의 손은 종종 정확한 절반을 맞춰 접지도 못했다. 삐뚤거리는 페이지들을 겹쳐 놓고선 중철 스테이플러로 대충 찍었다.

그렇게 만든 묶음은 제법 두꺼워졌고, 무게도 생겼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모니터와는 전혀 다른, 페이지 레이아웃 중앙에 접힌 흔적을 드러낸다. 두둘두둘한 종이의 텍스처는 이미지에 골고루 퍼져 있다. 레이저 프린터의 검은색 잉크가 형광등 조명에 조금씩 반사되기도 한다. 책 전체 두께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잉크가 만들어 내는 미시적 레벨의 차이. 그 차이가 몇 십 페이지에 걸쳐 더하는 무게를 느끼고서야(물론 잉크는 전체 무게에 거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모은 이미지들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을 것처럼 안심했다.이렇게 만든 종이 책은 이제 평평한 무엇이 아닌 듯해 보인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그다음에는 모니터 옆에 놓인 아이폰으로 그럴듯한 사진을, 스스로 만든 진의 인증샷을 한번 찍을 차례다. 인간이 만들어 낸 삐뚤빼뚤함, 싸구려 프린터의 허술함은 조그마한 스마트폰 렌즈 안으로, 내부 시시디 안으로 통과하며 여과될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의 노이즈는 허술한 책과 책이 놓인 배경에 일괄적인 텍스처를, 마치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듯한 흔적을 부여한다.

살짝 어긋난 시점, 종이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나만의 책, 그것은즉물성을 상징하는 아날로그의 실체로서, 다시 두께도 무게도 없는 세계에 1인치당 72개의 픽셀로 기록되고 있다.

PBT(포토샵 브러시 텍스트) -1. 초 평면의 두께와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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