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DH-TEXT – SUPERELLIP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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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책

그래픽 디자이너 신동혁(1984~) 을 처음 만난 것은 2014년 미국에서 건축 대학원을 졸업하고 잠시 귀국했을 때였다. 서울 홍대 뒷길의 일본풍 가정식 식당에서 만났던 그는 이제껏 디자인한 책들과 제작을 앞두고 있는 사진집의 모크업(mockup)을 보여 주었다. 그중 모형은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상태의 흰 종이―일부는 단단하고 일부는 말랑말랑한―를 묶어 중철 제본한 것이었다. 신동혁은 이 모크업을 손에 들고 마치 커다란 건축 모형을 앞에 두고 프레젠테이션하는 건축가처럼 그가 앞으로 만들 사진집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성당의 헌 표피와 새 표피가 만나는 레노베이션을 상이한 질감을 지닌 두 가지 종이의 중첩으로, 깊이를 알 수 없는 건축물의 입체감을 책날개를 꺾어 만드는 조형으로, 다층의 시간이 섞인 공간의 깊이감을 검정 잉크를 수차례 인쇄하는 방식으로 보여 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의 모크업은 추상화된 건축 모델이 되어 여러 세대를 지나며 지속적으로 증축된 성당의 양식을 담는 기록물을, 책의 양식과 형태를 통해 공간의 인식을 확장하는 출판물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날 미래에 출간하고자 하는 책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훗날 그가 반드시 디자인해 주었으면 하는 나의 책 『ISBN』에 관해 오랜 시간 대화했다. 당대 건축의 재현이라는 이 책의 주제를 듣고 그는 곧장 책의 형태와 구조를 위한 여러 개념을 생각해 냈다. 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책의 형식을 역으로 활용하고 싶어 했다. 안과 밖이 뒤집힌 외부, 주석과 이미지가 역전된 내부 등 그가 쏟아 낸 생각들은 『ISBN』의 주제를 반영하는 또 다른 건축 계획이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우리는 만날 때마다 이 미래의 책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것의 큰 틀과 세부를 검토하고 조정한다. 대규모 건축물의 설계 기간이 대개 1~2년을 넘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면, 수년간 다양한 선택과 경우의 수를 입체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이 미래의 책 작업이야말로 건축 프로젝트와 다름없는 것 아닐까.

모호한 형태와 미시적 변화의 공간

신동혁과 처음 협업을 하게 된 것은 그날 이후 3년이나 지난 2017년 가을이었다. 2016년 여름에 개인적으로 진행했던 건축 강의의 강의록 『Hard Times Selections』 디자인 작업을 그에게 의뢰했다. 나는 그래픽 디자이너들과 협업 시 그들에게 특정 형태나 조형 방식에 일부 제한을 가하는 식으로 디자인 작업을 의뢰해 왔다. 건축가에게 건축 법규, 도시 계획 등과 같은 제약이 건축물의 경계와 부피 등을 제한하는 한계로 작용하는 동시에 창의성과 혁신성을 촉발하는 계기로 기능하는 것처럼, 그래픽 디자이너들에게도 어떠한 제약이 그들의 새롭고 남다른 시각과 사고를 끌어낼 기폭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렇지만 신동혁과의 협업에서는 제약 제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 스스로 이미 작업 시작 단계에서 디자인을 위한 제약을 설정했기 때문이다.

신동혁은 『Hard Times Selections』가 전시 공간의 평면처럼 동일 구조 혹은 질서를 따르도록 경계를 정했다. 그것은 건축 강의를 진행할 때 활용했던 36종의 라벨지 템플릿으로부터 추출한 선들을 쌓고 교차시켜 만든 그리드로 이미지, 텍스트, 약물 등을 넣기 위한 양식이 된다. 이는 에셋(asset), 구축선(construction line), 컨벤션한 디테일 등 이미 정해진 표준들을 적용하며 창작하는 당대의 건축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건축 강의를 위해 수집한 1,567개의 이미지와 캡션은 동일한 그리드 시스템의 적용 아래 두 권의 책에 나뉘어 담긴다. 하지만 그리드 시스템은 도시의 건축물이 하나의 도시 계획하에 각각 다르게 설계되듯 각 책이 품고 있는 콘텐츠의 특성에 따라 상이한 방식으로 활용된다. 이미지가 실린 책의 경우 이미지의 크기와 비례가 일관되지 않기에 그 변화에 따라 그리드를 활용한 표의 형태를 다양하게 변형해 적용하고, 캡션이 실린 책의 경우 캡션 폰트의 크기와 비례가 일관되기에 그리드를 활용한 표의 형태를 일정하게 유지해 적용한다.

가로세로 선으로만 이루어진 벽은 흑백 이미지와 텍스트가 놓인 바닥, 빈자리에 홀로 선 정사각형, 마름모, 원 형태의 기둥을 만나며 새로운 공간을 창출한다. 이것은 강의자가 기획했던 공간의 실현도 수강자가 경험했던 공간의 재현도 아닌 그래픽 디자이너가 쌓아 올린 제약과 설계의 현현이다. 독자는 회색의 재킷과 한 몸이 된 두 권의 책을 쌍여닫이문 열듯 펼쳐 하나이지만 둘인 건축물 사이를 거니는 도시적 경험을 한다. 그들은 이미지가 실린 책을 넘길 때마다 예측할 수 없는 모호한 형태의 공간을, 캡션이 실린 책을 넘길 때마다 확정할 수 없는 미시적 변화의 공간을 걷는다.

개념과 실천의 순환 체계

신동혁과 도곡동의 브라운핸즈 커피숍에서 만나 나누었던 2017년 12월 15일 금요일 오후의 대화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날 우리는 『Hard Times Selections』의 개념과 그리드 시스템에 대한 회의를 끝낸 뒤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그에게 문득 왜 디자이너는 자기 작업에 관해 직접 이야기하는 일이 흔하지 않은지, 왜 디자이너는 자기 작업에 영감을 준 직접적 레퍼런스에 관해 언급하는 일이 많지 않은지, 그리고 왜 디자이너는 건축가처럼 자신의 이름을 단 작업 포트폴리오를 주기적으로 내지 않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것은 여러 디자이너와 교류하며 들었던 건축가로서의 순수한 의문이었다.

민감한 질문이 분명했음에도 그는 진심으로 공감하며 답해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정현 씨는 건축물이 되고자 하는 책을 만들면서, 왜 그 책을 위한 건축물을 짓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아마도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겠지만, 난 그의 질문이 책을 위한 가구, 책을 위한 공간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미팅 후 즉시 사무실로 돌아와 내가 만들었던 책 『CC』, 『AIR』, 『IMG』, 『BGIMG』를 위한 책장 디자인에 몰두했고, 그날은 평소보다 더 늦게까지 작업했다. (이미지 폴더의 첫 렌더링 프리뷰 이미지를 저장한 시점을 확인해 보니 2017년 12월 16일 새벽 2시 38분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난 수년간 나의 건축적 실천이 책, 사물, 가구, 공간으로 꾸준히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신동혁과의 협업, 신동혁과의 대화 때문이었다. 신신의 개인전과 신동혁에 관한 책을 연속으로 기획한 것은 그에 대한 보답이자 내가 그에게 던졌던 질문들―그 또한 계속 고민해 왔을―에 답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그와 함께 전시를 준비하고 책을 구상하며 신동혁의 디자인적 실천이 전통적 매체인 인쇄물, 특히 책에 집중되어 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 많은 수의 한국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전시, 영상, 퍼포먼스 등으로 그 외연의 확장을 도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분명 특이한 행보이다. 전시장 뒤편에서 책의 다양한 형식을 끈질기게 연구하고 분석해 왔던 그는 역설적으로 책의 범주를 넘어선 표본들을 어느 누구보다 풍부하게 선보이고 있다. 그가 책이라는 엄밀한 형식의 틀에서 진행한 실험은 예술적 책을 낳기 위한 과정이 아닌 책의 예술로 향하기 위한 헌신이다.

신동혁은 공간 형태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반영할 수 있는 효율적 모델로서 책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순수한 물질과 구축으로 이루어진 실질적 공간을 반영하는 책을 희망한다. 울리세스 카리온(Ulises Carrion, 1941~1989)의 “책은 공간들의 순차”라는 표현은 그가 만드는 책의 표피부터 각 페이지의 내부, 재료의 미시적 상황까지 그대로 들어맞는다. 설계자 일인의 시점에서 구축된 그의 책은 분리 가능한 표피와 구체로 이루어진 건축,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상을 비추는 또 다른 현실이다.

신동혁—책, 건축이 책이 되기 위해, 책이 건축이 되기 위해 – 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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