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ED1-TEXT – SUPERELLIPSE

SEED1-TEXT

최근에 여러 곳에서 책에 대한 강연을 했다. 출판사 대표로서. 하지만 나의 본업에서 연유한 것임에도 책을 말하는 것은 아직도 어색하다.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내가 내는 책을 선례를 들어 설명하기 어려운 탓이다. 장르로서도, 형식으로서도 내 책은 그 어디에 속한다고 말하기 쉽지 않다.

내가 내는 책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담지만, 터무니없을 정도의 노력을 들여 만들어진다. 내가 내는 책의 정가는 그 내용을 생각한다면 싸다고 할 수 없지만, 디자인이나 형식의 정교함을 생각한다면 비싸다고 할 수도 없다. 독자 대다수에게는 이런 것들이 크게 대수롭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작가나 출판 관계자가 보기에는 매우 이상하고 비효율적인 행위다.

내가 만든 책의 대부분은 콘텐츠를 담기 위한 책의 부피와 쪽수부터 설정된다. 이후 성심을 다해 만든 아름다운 틀에 맞추어 글을 쓰고, 때때로 글이 틀에서 넘치기라도 하면 틀에 맞도록 줄인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이 비효율적인 방식을 만들었다. 하지만 글을 재밌고 빠르게 완성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는 매우 효율적인 방식이다.

SNS에서의 글쓰기를 떠올려 보자. 사용자는 작은 프레임에 맞추어 제한된 글자 수로 불편하게 글을 쓴다. 그럼에도 어떤 이의 것은 그 분량이―SNS에 게시된 글 혹은 글 타래를 복사해 워드에 붙여 확인했을 때―A4 용지 기준 3~4쪽을 넘기도 한다.

이것은 내가 한 주간 써내는 원고의 평균량보다 많다. 어떻게 그러한 생산이 가능할까? 무엇이 글 쓰는 것에 재미를 느끼게 하여 엄청난 양을 거침없이 뿜어져 나오게 할까? 나는 늘 그 생산력에 감탄하고 만다

한편으로 작은 해상도로 그림을 그리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300ⅹ300픽셀의 해상도에 그렸던 오에카키(お絵かき) 드로잉을 나는 몇 날 며칠에 걸쳐 완성하곤 했다. 그런데 정작 포토샵을 실행해서 높은 해상도로 인쇄를 고려하며 그리기 시작했을 때는 고민만 하다가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작은 프레임은 불편하긴 해도 쉽게 채울 수 있다. 1리터짜리 아메리카노를 하루 동안 다 마셔야 한다고 생각하면 부담스럽지만, 아메리카노를 머그잔으로 하루 세 번 마신다고 생각하면 별로 부담이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무엇이든지 작게 나누어서 한 부분씩 ‘그냥’ 하면 될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큰 화면, 많은 분량, 긴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 때는 처음부터 커다랗게 비워 두고 시작한다. 그래서 다들 원고나 리포트를 쓸 때마다 SNS에 글을 써 올릴 적의 자유와 재미를 잃고 헤매는 것 같다.

나의 책은 내가 쓴 글, 내가 그리거나 포착한 이미지를 그냥 모아서 펴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프레임 구조의 결과물이다. 책의 주제나 소재, 심지어 의미도 그다음의 문제일 뿐이다. 심지어 요즘은 내가 프레임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써서 책을 채워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혹시라도 이것이 지나치게 전위적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책을 낸다는 행위 자체는 이미 너무나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며, 책에 담긴 내 생각은 매우 안전한 도피처에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그렇기에 어느 누구보다 머릿속 생각을 자유롭게 펼쳐 놓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혹자가 나의 책을 읽고 온라인에서 익명으로 그것은 책이 아니라고 비판할지라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이는 나의 멘탈이 강해서가 아니라, 내가 글 쓰는 것을 그 누구도 막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방해하는 것은 나의 손을 억지로 잡거나 잘라서 글을 쓰지 못하게 만드는 존재의 등장뿐일 텐데, 아마도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틀에 맞추어 글을 쓴다는 것이 지속 가능한 일일까? 당연히 가능하다. 매번 새로운 틀을 고안하면 된다. 사실 지금도 고안하고 있다. 예산과 시간의 부족조차 흥미로운 제한이 된다. 이 책이 그러하다. 글을 더 쉽게, 더 가볍게, 더 적당하게, 더 빠르게 써 내려가며 책을 채우고 있다.

일기와 에세이를 담은 이 작은 책은 그 형식이 전자책이라도 괜찮고 블로그여도 문제없다. 다만 프레임이 작다는 것을 독자가 체감하기 위해서는 종이책이 훨씬 나아 보인다. 디지털 매체라면 디바이스에 따라 형태가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나는 ‘대체 왜 이런 작은 종이책을 만들었냐?’는 누군가로부터 분명히 받을 것만 같은 질문에 대한 답만으로 이 책의 시작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SEED Vol.1, 200222 작은 프레임 – 정현

SEED 구매하기
초타원형 스마트스토어